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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 노벨문학상과 계엄

급격한 온탕, 냉탕 오간 2024년...성숙한 소통 고민할 때

<유현숙의 위로와 화해>


[칼럼] 노벨문학상과 계엄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몇 년 전 처음 폈을 때, 처음 자극된 건 후각이었다. 한강 작가는 특유의 치밀한 묘사로 오감을 자극해 독자를 5.18 당시 전남도청 현장으로 데려가는 듯했다. 채 몇 장 넘기지 못해 썩은 몸에서 나는 시취, 찢긴 몸에서 흘러나온 내장에 대한 묘사에서 그만 견디지 못하고 책장을 덮어버렸다. 최근 완독했을 때야 마지막에 소년이 우리를 햇빛과 꽃이 있는 밝은 곳으로 이끈다는 걸 알았다.


이처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쓴’(노벨위원회가 밝힌 선정 이유)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게 올해 10월 10일. 그리고 50여 일만인 11월 29일에는 청룡영화상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우연히도 큰 상을 받은 작품들이 같은 역사적 사건,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2024년은 뜻깊은 한해로 기억될 것 같았다. 마침내 대한민국이 군사독재와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밝은 꽃길로 나아가는가 싶었다. 적어도 감시와 폭력, 말하고 행동할 자유에 대한 억압에서는 벗어나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는 세상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안심과 기쁨도 잠시였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선정에서 정확히 54일 뒤, 그리고 청룡영화제가 열린 지 불과 4일 만에 대한민국은 ‘비상계엄’ 사태로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이라는 문구가 3번이나 반복된 계엄령은 우리를 순식간에 1980년대로 데려갔다. 트라우마를 간신히 치유해 조금 햇빛을 보려고 얼굴을 내미는데 총칼을 든 군인들이 다시 나타나 군홧발로 짓밟는 듯한 느낌을, 눈 있고 귀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격동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사상과 이념이 대립하고 부딪친 순간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맥락 없이, 절차 없이, 이해 불가능한 일이 또 있었던가. 누가 ‘종북’을 했고, 누가 국가에 반했으며, 또 만에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일거에 척결’ 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대통령에게 주었는가. 단어를 하나, 하나 뜯어봐도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였다. 애초에 ‘척결(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냄, 나쁜 부분이나 요소들을 깨끗이 없애버림)’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화감이 너무 커서 비현실감마저 들었다. 밤새 헬기 소리가 하늘에 울리고, 군인들이 국회를 막고, 선관위를 깨부수고 들어가고, 주요 언론인과 정치인들을 체포하러 나서는 장면들을 보며 국민 모두는 공포를 느꼈다. 흉흉하고 불안한 밤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급격한 온도 차의 온탕과 냉탕을 오가느라 우리는 어지럽고 아프다.
 


필자는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지역 도서관에서 열린 <한강 작가 읽기> 독서토론회에 참석했다. 참석자 중 한 명은 작가가 피해자의 상황만 담았다며 비판했다. 맞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국가 명령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민주화 항쟁에 진압 조로 투입돼 총칼을 휘두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서’ 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그 시대에 교육받은 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이제 와 가해자로 지목되는 것이 분하고 억울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고, 한편으로 안쓰러운 감정도 느낀다.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손을 잡는다는 감정이 어떤 건지 그 모임에서 한 번 더 배웠다. 참석자들은 다른 의견이라도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왜 그런 말 하는지 압니다. 얼마나 힘들었나요. 이제 상처를 딛고 더 나은 날들을 향해 같이 가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함을 오히려 일반 시민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배우고 실천하고 있다.


2024년을 마무리하는 마당에 이번 계엄 사태가 오점과 얼룩에 그치지 않고, 이런 문화적, 정치적 성숙함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그 전에 적어도 당장 눈과 귀를 열고 대다수 사람들이 자각하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되찾길 호소한다. 
 

유현숙 임상심리전문가/인지행동치료전문가